2차전 반전카드, '주문형 반도체' 부상
커진 'AI 서비스' 시장에 '최적화 이슈'까지
GPU 성장률 따돌린 주문형 반도체
'CES 2025' 주인공... "한국만 소외" 우려
'메모리 반도체' 혈투에 삼성·SK도 '미지근'
제2, 제3의 'TSMC' 키워낸 대만
반도체 설계·제조·패키징 생태계 구축
"AI 기술·주문형 반도체 개발 용이할 것"
급해진 한국, 전문인력 확보부터 숙제
"될성부른 기술·기업, 집중 육성해야"
[디지털포스트(PC사랑)=최유진 기자]
"한국은 다른 나라에 비해 주문형 반도체에 대한 관심이 매우 낮습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메모리 반도체에만 집중하는 점도 아쉽습니다."
"정부 차원 지원이 이뤄지고 있지만, 지금 정도로는 턱없이 부족합니다."
"전문인력들이 해외로 빠져나가면서 인력 구하기가 하늘의 별따기입니다."
지난 7일부터 10일까지(현지시간) 나흘간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세계 최대 규모 IT·전자 전시회 'CES 2025'. 당시 전시회장에서 만난 국내 팹리스(반도체 설계 전문회사) 기업들은 "갈수록 커지는 주문형 반도체 시장에서 한국만 소외되고 있다"며 이같이 우려했습니다.
뼈아픈 지적입니다. 인공지능(AI) 시대가 개막하면서 세계 반도체 시장 패권이 주문형 반도체(ASIC)로 옮겨가고 있지만, 우리에겐 아직 '남의 나라 이야기'입니다.
올해 CES에서도 주문형 반도체를 들고나온 미국과 대만 기업들을 중심으로 스포트라이트가 집중됐습니다. '반도체 강국'이라고 자신해왔던 우리나라는 자존심을 단단히 구겨야만 했습니다.
시장경제와 디지털포스트(PC사랑)는 주문형 반도체가 왜 이렇게 주목받고 있고, 이 시장에서 한국이 경쟁력을 갖추기까지 해결해야 할 과제가 무엇인지 짚어봤습니다.
'주문형 반도체'가 다시 뜬 이유
주문형 반도체는 갑자기 등장한 개념이 아닙니다. 일반적으로 팹리스 회사들이 주문형 반도체를 만듭니다.
팹리스 한 곳에서 통신 칩을 만든다고 가정해 보면, 먼저 5G(5세대 이동통신)와 관련한 국제 표준이나 규격에 맞는 알고리즘을 설계합니다. '어떨 때 5G가 아닌 와이파이를 쓸지', '주파수 대역은 어떻게 설정할지' 등 다양한 상황별 규칙을 정하는 과정입니다. 그런 다음 알고리즘을 기반으로 설계 회로도(IP)를 그립니다. 여기에 팹리스 회사만의 노하우가 녹아들어 갑니다.
칩 성능을 테스트하는 시뮬레이션이 이어집니다. 하드웨어로 칩을 찍어내기 전에, 프로그래밍 반도체(FPGA)를 활용해 본래의 목적대로 칩이 작동하는지 가상의 공간에서 검증하는 단계입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회사를 찾아갑니다. 칩의 성능 극대화를 위해 트랜지스터와 커패시터의 길이, 두께는 물론 메모리 반도체 종류까지 정해 칩 제조를 맡깁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완성된 통신 칩을 주문형 반도체라고 부릅니다.
위 내용을 종합해 보면, 설계 회로가 물리적으로 고정된 칩은 모두 주문형 반도체입니다. 이 칩이 전 세계적으로 널리 사용된다고 해서, 이른바 '범용 반도체'로 오해해선 안 된다는 것입니다. 엔비디아의 그래픽처리장치(GPU)도 주문형 반도체 범주에 속합니다.
☞지식 Tip, '쿠다' 때문에 GPU는 범용 반도체(?)
-고성능 하드웨어(HW)도 소프트웨어(SW)의 뒷받침이 없다면 무용지물입니다. PC에 운영체계(윈도, 맥 등)라는 SW를 설치하지 않으면 PC가 작동하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쿠다(CUDA)는 엔비디아 GPU에 최적화된 SW입니다. 2016년 출시됐습니다. GPU 내 여러 기능을 상황에 맞춰 효율적으로 불러내는 역할을 맡고 있습니다.
-현재 200만명이 넘는 개발자들이 쿠다를 사용 중인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쿠다에 접속하면 다양한 AI 개발 프로그램이 모여있고, 언제든지 자유롭게 무료로 이용할 수 있다 보니,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이는 엔비디아의 치밀한 전략이기도 합니다. 설령 GPU 성능이 경쟁사 대비 밀려도, 개발자들을 붙잡아놓기 위해 쿠다 생태계를 확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른 회사 GPU를 쓰려면 다시 전용 SW를 몸에 익혀야 한다는 불편함을, 엔비디아 독주를 공고히 하는데 활용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실제 엔비디아 전체 직원 가운데, 절반 이상은 하드웨어 분야가 아닌 쿠도를 고도화하는 SW 개발자입니다. IT 업계 일각에서는 "쿠도가 존재하는 한, 엔비디아 GPU는 예외적으로 범용 반도체 봐야 한다"는 말까지 나옵니다.
그렇다면 예전부터 사용돼온 주문형 반도체가 지금처럼 폭발적 관심을 끌어낸 배경은 무엇일까요. AI를 빼놓고 얘기하긴 어렵습니다.
AI는 학습한 내용을 바탕으로 스스로 추론하는 기술을 뜻합니다. 예를 들어, AI에게 고양이 사진 100장을 보여주며 학습하도록 합니다. 이후에는 AI에게 어떤 사진을 제시하더라도 그 속에 고양이가 있는지 찾아낼 수 있습니다.
예시는 간단하지만 AI 시스템(AI 모델)의 추론 결과가 정확도를 높이려면, 방대한 양의 학습용 데이터가 필요합니다. 이들 데이터를 빠르게 읽어내기 위한 대규모 컴퓨팅 자원도 요구됩니다. 생성형 AI 열풍을 일으킨 '챗GPT'에만 1만개가 넘는 엔비디아의 GPU가 활용된 것으로 전해집니다. 거대 자본을 갖춘 미국의 기술기업, 이른바 빅테크가 아니면 이 시장에 발을 담그기조차 어려운 이유입니다.
실제 오픈AI의 챗GPT, 메타의 '라마', 구글의 '제미나' 정도가 대표적인 AI 모델로 꼽힙니다. 국내에선 네이버가 AI 모델(하이퍼클로바X)을 자체 개발하며, 경쟁에 뛰어들었습니다.
이런 가운데, 새로운 시장이 열렸습니다. 이들 AI 모델을 활용해 실시간 번역이나 콘텐츠 추천과 같은 'AI 서비스'를 선보인 기업들이 급증한 결과입니다. 이는 반도체산업 패러다임을 바꾸는 계기가 됐습니다. AI 서비스용 주문형 반도체 수요가 비약적으로 커졌기 때문입니다.
투자은행 모건스탠리에 따르면 주문형 반도체 시장의 성장률이 AI 시대 가장 큰 수혜를 맛본 GPU를 뛰어넘을 전망입니다. 리서치 전문 기업 'QY리서치'는 주문형 반도체 시장 규모가 2030년 854억 달러(약 125조3700억원)에 달할 것으로 내다봤습니다.
호재는 또 있습니다. '반도체 최적화' 이슈입니다. 반도체의 성능이 고도화되고, 회로 미세화가 진행될수록 필연적으로 발열 문제가 뒤따릅니다. 소비 전력과 칩 가격도 상승합니다. 이러한 문제들을 개선하기 위해 기존 칩에서 불필요한 기능은 덜어내고, 강조할 성능만 올리는 식으로 주문형 반도체를 제작하려는 기업들이 늘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상승세가 계속될 전망입니다. GPU만 봐도 그렇습니다. 'NPU'(신경망처리장치)로 대표되는 AI 전용 연산기가 GPU 시장을 잠식하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CPU, GPU, NPU 등을 통합한 시스템온칩(SoC)을 중심으로 시장이 커지는 움직임도 눈에 띕니다. 이 같은 기술의 변화는 주문형 반도체 시장에 새로운 기회가 될 전망이다.
☞지식 Tip, 'NPU'는 왜 GPU의 경쟁자가 됐나.
-PC, 스마트폰과 같은 IT 기기에서, 연산을 담당하는 것은 CPU의 몫이었습니다. CPU는 복잡한 계산을 빠르게 처리하는 데 특화된 반도체입니다.
-그런데 AI 시대에 접어들면서, 트랜드가 바뀌었습니다. 단순한 계산을 동시에 처리하는 역량(병렬 연산)이 더 중요해졌습니다. 빅데이터를 기반으로 반복 학습하는 AI 모델의 특성이 그러하기 때문입니다. 병렬 연산에 최적화된 GPU가 주목받게 된 이유입니다.
-그런데, GPU는 본래 그래픽 처리용 반도체입니다. 애초 AI 연산용이 아니다 보니, 가격이 비싸고 전력 소모도 큽니다. 그래서 대안으로 AI 전용 연산기 NPU가 등장한 것입니다. 구글은 자체 NPU인 'TPU'를 출시하기도 했습니다. 모바일 기기에 주로 탑재되고 있습니다.
韓, 메모리 반도체 외엔 '미지근'
주문형 반도체를 둘러싸고 우리나라 기업들 반응은 아직 미지근합니다.
한국의 반도체 '양대 산맥'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조차 구체적인 사업계획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물론 삼성전자의 경우 메모리 반도체 외에도 자체 개발한 모바일 애플리케이션프로세서(AP) '엑시노스'를 선보이는 등 반도체 설계 역량 강화에 힘을 주고 있지만, 삼성전자의 세계 AP 시장 점유율이 줄곧 한 자릿수에 머물러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 성과는 미비한 실정입니다.
최근에는 AMD, 브로드컴, 마벨 등 주요 팹리스 회사를 비롯해 구글, 메타와 같은 빅테크 기업들과도 협력을 강화하며 변화를 기대하게 하지만, 언론에 공개된 정보를 종합해 보면 이러한 협력 대부분이 고대역폭메모리(HBM) 공급이나 파운드리에 관한 내용입니다.
SK하이닉스 분위기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시장경제와 디지털포스트(PC사랑)의 공동 취재 결과, 주문형 반도체와 관련한 개발 계획이 현재까지는 없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렇다고 두 회사를 질책하긴 힘듭니다. 세계 메모리 반도체 시장에서 거둔 성과가 매우 크기 때문입니다. 잘할 수 있는 분야를 선별, 집중으로 육성한 결과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전체 반도체 시장에서 메모리가 차지하는 비율은 30%에 이릅니다.
두 회사는 그 어느 때보다 예측 불가능한 도전에 직면했습니다. 메모리 반도체 시장 경쟁 구도가 다변화됐습니다. 미국 마이크론에 이어 중국 기업들까지 점유율을 높이고 있습니다. 주문형 반도체 회사들의 다양한 요구에 대응하기 위한 신기술을 개발하기도 벅찬 게 현실입니다. '메모리 성공 DNA'를 팹리스로 이식할 수 있을지 불투명한 이유입니다.
반도체 전문가들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만 바라볼 게 아니라, '반도체 생태계'를 구축하는 데 노력해야 한다고 입을 모읍니다. 대만이 좋은 예시가 될 수 있습니다.
☞지식 Tip, GPU는 'AI 반도체'가 아닙니다.
-흔히들 GPU나 HBM을 AI 반도체라고 부른다. 반은 맞고 반은 틀린 얘기입니다. 주문형 반도체도 그 자체만으로는 AI 반도체가 아닙니다.
-AI 반도체는 CPU, GPU, HBM을 합친 개념입니다. 과거에는 이들 칩이 분리돼 기판 등에 부착됐었습니다. 칩 간 간격 때문에, 입출력 시 효율성이 떨어진다는 지적이 제기됐습니다. 이에 따라 지금은 이들 칩을 마치 하나의 칩처럼 결합해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합쳐진 형태의 칩 덩어리를 AI 반도체라고 부릅니다.
멀어지는 대만... '반도체 생태계' 시급
대만은 반도체 설계에서 제조, 패키징까지 완벽하게 생태계를 구축했습니다. 세계 반도체 파운드리 1위 기업인 TSMC를 중심으로 강소기업들이 설계와 패키징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낸 결과입니다.
TSMC는 제조 분야에서 난공불락의 경쟁력을 확보했습니다. 시장조사업체 '트렌드포스'에 따르면 TSMC의 지난해 3분기 기준 시장 점유율은 64.9%에 달했습니다. 5나노 이하 최첨단 반도체 시장에서는 TSMC의 점유율이 90%에 가까울 것이라는 분석도 있습니다.
대만에는 TSMC에 버금가는 기업이 또 있습니다. 반도체 패키징 분야 세계 1위 기업인 'ASE홀딩스'가 그 주인공입니다. 반도체 설계 효율화가 한계에 달하면서 후공정의 패키징이 세계 반도체 시장의 게임체인저로 떠올랐다는 점을 감안하면 더욱 대단한 기록입니다.
대만은 미국기업들이 독주하는 설계 분야에서도 압도적 존재감을 뽐내고 있습니다.
시장경제와 디지털포스트(PC사랑)가 2023년 기준 세계 주요 팹리스 기업들의 매출을 취합해본 결과, 상위 10위권 내에 대만 기업 4곳이 이름을 올렸습니다. 미디어텍(5위), 노바텍(6위), 리얼텍(8위), 하이맥스(9위) 순서로 집계됐습니다.
서울 강남구 소재 GPU 분야 팹리스 스타트업의 A대표는 "대만과 같은 생태계가 갖춰지면, AI와 주문형 반도체 개발이 용이해질 수밖에 없다"며 "대기업과 스타트업 간 상생, 정부의 지원을 바탕으로 우리만이 생태계를 구축해야 한다"고 주문했습니다.
<대만 반도체 빅3의 최근 3년간 실적 추이>
▲설계 분야 세계 5위 '미디어텍'
-2023년 매출 4334억TWD(19조1800억원), 영업이익 718억TWD(3조1781억원)
-2022년 매출 5487억TWD(24조3006억원), 영업이익 1267억TWD(5조6142억원)
-2021년 매출 4934억TWD(21조8434억원), 영업이익 1080억TWD(4조7829억원)
▲제조 분야 세계 1위 'TSMC'
-2023년 매출 2조1617억TWD(95조5703억원), 영업이익 1조1751억TWD(51조9398억원)
-2022년 매출 2조2638TWD(100조866억원), 영업이익 1조1212억TWD(49조5717억원)
-2021년 매출 1조5874억TWD(70조1796억원), 영업이익 6499억TWD(28조7355억원)
▲후공정 분야 세계 1위 'ASE홀딩스'
-2023년 매출 5819억TWD(25조7261억), 영업이익 407억TWD(1조7997억원)
-2022년 매출 6708억TWD(29조6659억원), 영업이익 797억TWD(3조5281억원)
-2021년 매출 5699억TWD(25조2052억원), 영업이익 793억TWD(3조5083억원)
다만, 반도체 전문가들은 대만과 같은 생태계 구축에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으로 내다봅니다.
특히 SW 전문인력 확보를 가장 큰 숙제로 꼽습니다. 주요 반도체 기업들 간 인력 유치전이 이미 매우 치열해졌기 때문입니다.
이번 CES 만난 복수의 반도체 기업 관계자들 사이에서도 "주문형 반도체관련 부서를 신설한 엔비디아 역시 부족한 인력을 채우기 위해 미디어텍을 비롯한 경쟁사의 인재들을 영입하고 있다"는 말이 돌 정도입니다.
CES에서 전시관을 꾸린 국내 팹리스 기업의 B임원은 "주문형 반도체는 설계 초기 단계부터 개발 비용이 많이 드는 데다, SW 개발자 몸값마저 천정부지로 치솟고 있다"며 "무조건 대만을 쫓아갈 게 아니라 한국이 잘할 수 있는 분야, 기술력을 갖춘 기업을 선별해 집중적으로 육성하려는 정부의 과감한 결단이 필요하다"고 당부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