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호 커버스토리 : 트럼프2.0 위기인가, 기회인가?
'원팀'에서 나오는 강한 조직력 '흔들'
'성공 방정식' 균열... '반도체 위기론' 단초
삼성 반도체 전권 쥔 전영현 부회장
'원팀. 고객 중시' 키워드... 방향성 제시
'먼저 맞은 매' EUV 임상경험... 반전 승부수
HBM4, 공정 고도화 불가피 ... 변곡점 될 것
전영현, 사업 기회 발굴의 명수... 대반격 속도전
<편집자주>
'강한 조직력.' 삼성 전현직 임직원들이 꼽는 삼성전자의 '성공 방정식'입니다.
노련한 리더가 구체적인 로드맵을 제시하면 직원들이 빈틈없이 맡은 역할을 완수해내는 것.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지만 삼성전자만큼 리더와 직원 간 호흡이 잘 맞물린 톱니바퀴처럼 돌아가는 곳은 흔치 않습니다.
경쟁사 제품을 옆구리에 끼고 출근한 리더가 아침부터 직원들을 불러 모아 해당 제품의 아쉬운 점을 흰 칠판 위에 나열하면, 직원들이 개선책을 찾을 때까지 스스로 일에 몰두하는 모습이 삼성에서는 일상과도 같았다는 증언이 나옵니다.
하지만 수년 전부터 삼성의 이같은 성공 방정식에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는 이야기가 들립니다. 리더와 부서원간 소통과 신뢰가 예전만 못하다는 말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진원지는 반도체 사업부입니다. 일각에서는 DS(반도체) 부문 직원들을 중심으로 꾸려진 삼성전자 노조의 파업을 일례로 들기도 합니다. 흔히 말하는 삼성 위기론 내지 반도체 위기론도 뿌리는 같습니다.
여러 가설을 내세워야만 삼성 반도체의 '반전 시나리오'가 그려진다는 것만으로도, 철옹성과 같았던 위상이 흔들리고 있음을 반증합니다. 특히 삼성이 압도적 우위를 점했던 메모리반도체와 관련돼, 경쟁사에 한박자 늦은 행보를 보이는 모습은 낯설기까지 합니다. 대표적인 품목이 고대역폭메모리 HBM입니다.
'반전 카드'가 절실합니다. 여러 진단과 처방이 있겠으나 '총론적 해법'은 의외로 간단할 수 있습니다. 과거의 성공 방정식을 되살리는 것입니다. 삼성도 비슷한 진단을 내린 듯 합니다.
최근 마무리된 정기 사장단 인사를 통한 삼성의 메시지는 짧고 분명합니다. 올해 5월 말 삼성 반도체 지휘봉을 7년 만에 다시 잡은 전영현 DS 부문장(부회장)이 '책임경영'에 나설 수 있도록, 확실하게 힘을 실어준 것입니다.
삼성이 경쟁사를 압도해왔던 '초격차 기술' 전략의 창시자이자, 반도체 업계 입지적 인물로 통하는 전 부회장을 전면에 내세워 직원들과 '원팀'을 구성, 삼성전자 특유의 유기적 조직력을 부활시키겠다는 의지를 드러낸 것으로 풀이됩니다.
<디지털포스트(PC사랑>는 삼성 전현직 임직원들에 대한 교차 취재를 통해, '리더 전영현' 앞에 놓인 과제가 무엇이고, 그가 어떤 승부수로 지금의 위기를 헤쳐나갈지 분석해 봤습니다.
무모 혹은 과감?... '1C D램, HBM4' 동시 개발
[디지털포스트(PC사랑)=최종희, 최유진 기자] 인공지능(AI) 시대가 열리면서 '고대역폭메모리(HBM)'로 대표되는 고성능·대용량 메모리 칩이 주목받고 있습니다.
HBM은 차세대 D램으로 불립니다. 고성능 D램을 위로 여러 겹 위로 쌓아올린 형태입니다. 지금까지 HBM은 GPU 바로 옆에 붙이는 방식으로 활용되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 GPU와 D램 사이 접촉 면적은 넓히고 거리는 짧게 해, 데이터가 빠르게 오갈 수 있도록 한 것입니다.
삼성전자는 반격의 첫 번째 카드로 HBM 6세대 제품인 'HMB4'를 낙점했습니다. 내년 연말까지 HMB4를 양산하겠다는 구체적인 목표도 제시했습니다. 특히 HMB4에 1C(10나노급 6세대) D램을 쓰겠다는 것이 삼성의 전략입니다. 글로벌 반도체 기업들이 목표로 설정한 1C D램 양산 시점은 내년 말입니다. 삼성의 시간표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삼성은 반도체연구소를 중심으로 1C D램 개발에 모든 연구 역량을 집중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업계 관계자 가운데는 삼성의 'HBM 로드맵'을 두고 고개를 갸우뚱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성공 가능성이 불투명하다는 것입니다. 기술적 난이도는 차치하더라도, 개발에 필요한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는 우려가 있습니다.
삼성전자는 HBM 5세대 제품인 'HBM3E'에 1A(10나노급 4세대) D램을 적용 중입니다. 반면 경쟁사들은 한 세대 앞선 1B(10나노급 5세대) D램 기반 HBM3E를 양산하고 있습니다.
경쟁사들은 HBM4에도 1B D램을 쓰기로 했습니다. 이미 5세대 제품에 1B D램을 적용한 경험이 있어, 수율 안정성과 원가 경쟁력에서 우위를 점하겠다는 의도가 읽힙니다.
삼성전자의 HBM4 로드맵이 지나치게 공격적이라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입니다. D램이 HBM에 탑재되기 전까지는 일종의 '안정화 기간'을 거칩니다. 양산된 D램을 PC와 모바일, 고성능 서버에 차례로 넣고 돌려보면서 성능과 안정성을 살핍니다. 그렇게 충분한 검증을 거친 뒤 HBM에 탑재합니다. 그 기간이 적게는 1년, 많게는 1년 6개월 정도 소요됩니다. D램을 여러 겹 쌓아올리는 HBM의 구조적 특성상 불량률이 높아질 수밖에 없다 보니, 코어 D램의 안정성을 높이는데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 것입니다.
반도체 전문가 A는 "보통 D램 수율이 80~90% 선일 경우, HBM 수율은 60% 선에 그친다"며 "아직 개발도 끝나지 않은 1C D램을 내년 연말 HBM4에 넣겠다는 계획은 비현실적"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업계 전문가들이 아는 사실을 삼성전자가 모를 리 없습니다. 삼성과 같은 글로벌 기업이 근거 없이 공수표를 날렸다고 보는 것도 현실성이 없긴 마찬가지입니다. 결국 '믿는 구석이 있다'는 합리적 추론에 무게가 실립니다.
삼성의 믿는 구석 '하나'... 'EUV 임상경험'
반도체 전문가들은 삼성전자가 던질 수 있는 승부수로 ▲극자외선 노광장비(이하 EUV) 임상경험 ▲자체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역량를 꼽습니다.
EUV는 삼성전자에게 '아픈 손가락'입니다. 삼성은 이 장비를 글로벌 업계에서 가장 앞장서 도입했습니다. EUV를 공정에 활용하면, 기존 제품 대비 회로 선폭을 14분의 1로 줄일 수 있습니다. 혁신적인 제품 생산이 가능해 삼성의 초격차를 이끄는 일등공신이 될 것이란 장미빛 전망이 쏟아졌습니다. 최선단 제품 개발과 양산을 앞당기고, 비용도 절감해 줄 것이란 기대는 시간이 흐르면서 실망으로 바뀌었습니다. EUV를 적용한 뒤, 오히려 경쟁사에 추월을 허용하는 역설적 상황이 벌어졌기 때문입니다.
원인은 '시간'입니다. EUV를 반도체 제조 공정에 적용하려면 매우 숙련된 전문인력이 필요합니다. 기술 난이도가 높고, 적용 방식이 까다로워 공정을 안정화하는데 상당한 시간이 소요됩니다. 삼성은 1A D램 개발 및 양산 과정에서 예기치 않은 시련을 겪었습니다. 경쟁사가 삼성보다 먼저 '개발 성공' 소식을 알린 것도 이떼가 사실상 처음입니다. 삼성이 D램 제조에 EUV를 본격 적용한 시기와 맞물립니다.
전문가 가운데는 EUV 조기 도입이 되레 삼성에 악재로 작용했다는 분석을 내놓기도 합니다. 공정이 안정화되지 않은 상태에서 무리하게 EUV를 사용하다 보니, 수율이 크게 떨어졌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사정이 다릅니다. 이유도 '시간'입니다. 다른 곳보다 앞장서 EUV를 도입, 사용한만큼 '임상경험'에서 비교우위를 가질 것이란 설명입니다. 이같은 시각을 갖는 전문가들은 "삼성이 체득한 EUV 임상경험이 HBM4 개발 경쟁에서 가시적 성과를 낼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HBM 개발 방향은 물리적 크기를 줄이는 것은 물론, 소비전력을 낮추고 처리 속도를 높이는 데 맞춰져 있습니다. 이를 위해선 D램 회로 선폭을 미세화하는 것이 필수입니다. 반도체 미세공정에서 EUV가 퀀텀점프를 이뤄낼 것이라는 관측은 꽤나 설득력이 있습니다.
삼성전자 내부 소식에 밝은 반도체 업계 관계자 B는 "EUV 기반 설계 역량을 갖췄다는 것은 HBM 원가 경쟁력에서도 우위를 점할 수 있다는 의미"라면서 "삼성전자가 EUV를 도입한지 3년여가 지났기 때문에, 이제는 EUV 활용 공정도 어느 정도 안정화가 됐을 것"이라고 내다봤습니다.
이어 "D램 한 세대를 건너뛸 만큼 빠른 기술적 진보를 이뤄내려면, EUV 활용도를 높이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을 예상하기 어렵다"고 덧붙였습니다.
삼성의 믿는 구석 '둘'... HBM4 로직다이 설계·생산 능력 갖춰
HBM4 자체가 앞선 세대와 차원이 다른 초미세 공정을 요구한다는 점도 눈여겨 봐야 합니다. HBM4는 데이터 저장장치로만 활용되던 이전 세대 제품과 달리, CPU나 GPU가 해왔던 연산기능 일부를 수행합니다. HBM과 GPU를 연결하는 '베이스(로직)다이'에 이러한 기능이 더해집니다. 앞선 세대의 로직다이는 HBM 끝에 부착돼, GPU와 신호를 주고받는 통로 역할을 해왔습니다. 이와 달리 HBM4 로직다이에는 고객 맞춤형 기능이 추가 탑재됩니다. 반도체 전문가들은 HBM4부터 CPU 내부에 있던 캐시메모리가 로직다이로 옮겨갈 수 있다고 내다봅니다.
로직다이 구조가 복잡해지면서, 파운드리 회사들의 역할이 커졌습니다. 기존에는 메모리 반도체 회사들이 로직다이를 직접 만들었지만, 앞으로는 파운드리 업체들이 위탁생산할 가능성이 커졌습니다.
삼성은 전 세계 유일의 종합반도체 기업입니다. 다른 경쟁사와 달리 로직다이를 내부에서 직접 설계, 생산할 수 있습니다. 로직다이 생산을 외부 파운드리사에 위탁해야 하는 경쟁사들과 비교할 때 분명 유리한 위치에 있다 할 것입니다.
반도체 전문가 C는 "삼성전자가 D램보다 압도적으로 수익성이 높은 파운드리를 등한시할 리가 없다"며 "HBM부터 시장의 신뢰를 회복하겠다는 내부 로드맵에 따라 HMB4 개발 이후에는 파운드리와 R&D에 대한 공격적 투자가 이뤄질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전영현의 '발전적 포기' 선언... "고객이 원한다면"
방향성은 정해졌고, 이제 필요한 것은 속도입니다. 삼성전자는 최근 올해 3분기 실적을 발표하는 자리에서 "고객이 원할 경우 경쟁 파운드리 회사와의 협력도 가능하다"고 밝혔습니다.
시장의 예상을 뛰어넘은 파격적 발언입니다. 삼성은 종합 반도체 기업의 장점을 바탕으로 '턴키(일괄 생산) 전략'을 고수해왔습니다. 전 부회장은 '고객의 니즈'를 전제로, 그 전략을 수정 내지 포기할 수도 있다는 말을 직접 꺼낸 것입니다.
시장을 안심시키기 위한 '쇼잉'에 불과하다는 해석도 있지만 전영현 부회장이 '고객'을 강조한 점은 가볍게 넘길 수 없습니다. 전 부회장은 과거부터 고객을 최우선으로 하는 경영자로 유명했습니다. 고객 니즈를 맞추는 과정에서 생각치 못한 사업 기회를 발굴한 사례도 많습니다.
삼성SDI 출신 고위 임원 D는 "과거 배터리 회사들이 전기차 시장에 목을 매며 승용차 캐파 확대에 나설 때, 전 부회장은 전기트럭과 전기버스 분야 고객 수요를 발견해내고 성과로 연결했던 인물"이라고 기억했습니다. 그는 "틈만 나면 고객을 언급했던 전 부회장이었기에 고객을 중심으로 한 승부수로 위기를 극복해 낼 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
전 부회장은 대반격을 함께할 직원들과 손발을 맞추는 데도 공을 들이고 있습니다. 과도한 불안심리를 다독이면서 삼성 특유의 조직력을 되살리겠다는 의지가 엿보입니다. 그는 지난 8월 사내 구성원을 대상으로 낸 메시지에서 소통과 토론 문화의 중요성을 강조했습니다. 다음은 전 부회장의 말입니다.
"직급과 직책에 관계없이 안 되는 것은 안 된다고 인정하고, 도전할 것은 도전해야 합니다. 투명하게 드러내서 소통하는 치열한 토론 문화를 재건해야 합니다."
노조와의 거리도 좁히고 있습니다. 평행선만 긋던 노조 집행부와의 갈등을 접고, 노사 합의안 도출이라는 급진전을 이뤄냈습니다. 지난달 열린 노조 조합원 찬반 투표에서 이 합의안이 부결되며 빛이 조금 바라긴했지만, 대화의 물꼬가 열렸다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크다는 평가가 나옵니다.
[Who is] 전영현
LG반도체 출신이다. D램 개발팀 연구원으로 근무하다, 1999년 LG반도체가 현대전자에 합병되면서 삼성전자 메모리사업부로 자리를 옮겼다. D램·낸드플래시 설계·개발과 전략 마케팅 업무를 거쳐 2014년 메모리사업부장에 올랐다.
2017년부터 5년간은 삼성SDI 대표이사를 역임했다. 지난해 말 삼성전자로 복귀해 미래사업기획단을 이끌었다. 그러던 중 올해 5월 '원포인트' 인사를 통해 삼성 반도체 사업을 총괄하는 DS부문장(부회장)을 맡게 됐다.
전 부회장의 역할과 책임은 더 커졌다. 지난달 마무리된 정기 사장단 인사를 통해 메모리사업부장, SAIT(옛 종합기술원) 원장을 겸임하게 됐다.
반도체 업계에서는 "고객 중심 경영과 '원팀' 전략을 강조해온 전 부회장의 리더십이 지금의 위기를 돌파할 승부수라고 판단, 확실하게 힘을 실어준 것으로 보인다"는 풀이가 나온다.
*공동 취재단 : 디지털포스트(PC사랑) 임병선 팀장, 이백현 기자 l 시장경제 산업1팀 최종희 팀장, 최유진 기자, 산업2팀 성지온 기자, 금융부 유경표 기자, 전지윤 기자